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 KAF 소식
  • 언론보도
언론보도

211126 [아프로 21] 함께 일어서는 환경을 조성하다- 우승훈 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과장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1-11-26 오후 4:38:00 / 1310

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우승훈 과장이 생애 첫발을 디딘 외국은 케냐였다. 평생 한 번 가기 힘든 아프리카대륙이 그에게 첫 해외 여행지가 된 배경에는 대학생 때 차곡차곡 쌓아온 봉사활동이 있었다. 우승훈 과장은 우연한 기회에 농촌활동에 참여하여 이타적 삶이 주는 행복감을 맛봤다. 그 후 자진하여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친 우승훈 과장은 그 경력을 내세워 해외봉사단에 지원했고, 이를 계기로 쭉 아프리카를 지향하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심층적인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구촌나눔운동의 르완다 사무소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한 우승훈 과장은 현재 서울에 있는 본부로 옮겨 케냐, 에티오피아, 르완다 사무소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진한 아쉬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여전히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대안을 찾는 여정에 그가 지원하는 아프리카 사무소들의 현지인 책임자들과 한국 본부에 마음 맞는 동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현지인 책임자들을 잘 지원했을 때 해당 사업이 그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고 지속가능해지리라고 믿는다. 또한, 우승훈 과장은 전 세계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많은 사회·경제·환경적 위기들을 아프리카대륙이 한발 앞서서 먼저 겪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우리 함께 관심을 기울이고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 시절 봉사활동이 맺어준 아프리카와의 인연

대학생 때 농촌활동을 활발히 다녔다. 대단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간다고 하기에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 단순히 농사일만 돕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의 목소리에 작게나마 힘을 보탰다. 그 과정에서 다른 환경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사소하더라도 내가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부풀어 올랐다. 방학 때 혼자 소록도를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센인들은 우리와 외모가 조금 다를 뿐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함께 생활하며 친근감을 느꼈고, 그들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 보람찼다. 2011년 한 오픈마켓에서 해외봉사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을 때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는 기회일 수 있다는 예감이 퍼뜩 들었다.


특히 여러 경로로 봉사활동을 이어온 내 경험이 긍정적으로 검토되리라 기대했다. 그때 봉사단을 파견하는 지역은 아프리카국가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베트남과 인도 같은 아시아 국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케냐로 향하는 봉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당시엔 케냐여서 좋았다기보다는 내심 이왕 갈 거면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던 터라 흡족한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사실 아프리카에 관심이 없었고 그만큼 무지했다. 오히려 케냐로 배정받은 후 정보를 찾느라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막연한 선입견이 생겼다. 한글로 검색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들이 질병, 기아, 내전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해외여행 아니던가. 덜컥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이 여정을 함께하는 20명의 봉사단원과 인솔자가 있어 불안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과 설렘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케냐로 향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에 있는 슬럼에서 일주일간 활동한 후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나망가(Namanga)의 마사이(Maasai) 지역에 있는 학교로 이동, 나머지 일주일을 보냈다. 처음 발 디딘 외국인 데다 그곳이 멀고도 낯선 아프리카의 대도시와 시골이었음에도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으로 농촌활동을 갔을 때 느꼈던 낯선 감정 정도였다. 오히려 소소한 차이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일이 즐거웠다. 특히 농촌활동을 통해 살아온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서 오는 배움과 즐거움을 이미 경험했었기에 케냐에서도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주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나는 아프리카대륙에 무한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안고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케냐에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서울에 돌아와 다시 바쁜 학교생활을 하는 와중에 문뜩문뜩 케냐 생각이 났다. 그전까지 동경한 적도 없는 곳을 고작 2주간 다녀왔을 뿐인데 어떤 강렬한 힘이 나를 이끄는 듯했다. 그때쯤 한 국제개발협력NGO의 인턴십 공고를 봤다. 케냐의 이웃 나라인 탄자니아의 다레살람(Dar es Salaam)이라는 대도시 외곽에 있는 빈민가의 여성들을 위한 직업 학교에서 일할 기회였다. 나는 케냐가 그리웠지만, 언어와 문화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 탄자니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지원했고, 1년 동안 탄자니아에 머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