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 KAF 소식
  • 언론보도
언론보도

220602 [아프로31]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투명한 시선을 갖다- 김성진 연합뉴스 요하네스버그 특파원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6-02 오전 10:49:00 / 1543

연합뉴스 김성진 기자는 지난해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아프리카대륙이라는 특수성에 이끌려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에 지원했지만, 막상 선발되자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기자로서 누구보다 분별력이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사람인지라 아프리카대륙을 검색하면 쏟아지는 부정적인 뉴스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생애 한 번 여행하기도 쉽지 않은 아프리카대륙에서 특파원으로 생활하는 것은 위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충분히 값진 경험이라 여겼기에 용기를 냈다. 하지만 김성진 기자가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에 도착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느덧 남아공에 다다라 빠르게 확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해외 특파원으로서의 일상은 그가 상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두 차례 국가 차원의 강력한 봉쇄령이 내려지며 집밖에 나갈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현장을 누빌 수 없는 현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아쉬워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정치 상황에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세하며 대륙 곳곳에서 사건사고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 순간 사자성어 하나를 떠올렸다. 자리에 앉아서 천 리 즉,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본다는 ‘좌견천리(坐見千里)’였다. 김성진 기자는 비록 남아공에 머물렀지만, 머릿속의 센서와 레이더는 아프리카대륙 전 방위로 가동했다.

다행히 인터넷의 발달이 그를 물심양면 도왔다.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9개국의 소식과 동향을 살피고 다양한 국적의 취재원들과 화상 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물론 직접 발로 뛸 수 없는 현실이 여전히 아쉽지만, 아프리카대륙 바깥이 아닌 그 속에서 대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또한,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곧 국내 독자들이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리카대륙을 향하는 투명하고 선명한 시선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성진 기자는 오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심히 기사를 쓰며 새로운 삶의 자세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유일한 한국인 특파원

10여 년 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특파원을 파견한다는 공고가 올라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지원했다. 요하네스버그는 연합뉴스가 국내 언론사 최초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특파원을 파견한 지역으로 그 의의가 특히 컸다. 아쉽게도 첫 번째 기회는 나보다 경력이 많고 노련한 선배에게 돌아갔으나 처음으로 특파원에 도전했던 지역인 만큼 요하네스버그는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지역이었다. 이후 나는 국내에서 다양한 부서를 옮겨 다니며 사회 전반을 향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한편,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으로 나간 선배는 파견 근무를 연장하며 거의 6년 동안 근무했다. 그런데 그 선배가 개인 사정으로 갑자기 귀국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4년 6개월간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직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케냐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통신원이 있었으나 국가기간 뉴스통신사로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계속 비워 둘 수 없다고 판단한 회사는 2020년에 다시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을 모집했다. 처음 해외 근무지로 마음에 품은 요하네스버그가 운명의 장소였을까. 돌고 돌아 나는 10여 년 만에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으로 선발됐다. 당시 우리 사회에는 아프리카대륙과 관련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던 만큼 출국을 앞두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으나, 나는 같은 특파원이더라도 제1 세계보다 제3 세계권에 가는 것이 더 의미 있으리라고 여겼다. 평생에 한 번 여행하기도 쉽지 않은 아프리카대륙에서 특파원으로 몇 년간 머무르며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소식들을 전하는 것이 특별하고 보람찬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려움도 컸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인터넷에 검색할 때마다 부정적인 기사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누구보다 편견이 없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지만 개인적인 일과 엮이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가 파견될 남아공의 경우 범죄와 관련된 기사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한동안 내 결정에 이게 맞나 싶어 확신이 서지 않았고 가족들도 걱정되었다. 그런데도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기회인 만큼 포기할 수 없었다. 특히 요하네스버그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특파원을 파견한 지역으로, 49개국을 담당한다. 그만큼 부담이 가중되겠지만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곧 국내 독자들이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고 상상하니 그만큼 값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용기를 내어 위험 부담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고 처음 마음먹은 대로 떠나기로 했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슬기로운 특파원 생활

내가 요하네스버그에 파견된 시점은 2020년 2월로, 그곳에는 치안 문제 말고도 또 다른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코로나19였다. 당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국경을 넘어 해외로 번지기 시작한 때로 인접한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우리가 떠날 무렵 국내에 확진자가 갑자기 증가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운 좋게 바이러스의 공격을 잘 피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리가 남아공에 도착할 무렵 아프리카대륙에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요하네스버그 특파원 석은 4년 넘게 공석이었기에 전임자로부터의 인수인계도 없이 혼자서 모든 과정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삼엄한 입국 심사를 겨우 뚫고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치안이 불안한 것은 물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시내를 무작정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장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자동차와 집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인수인계 없이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게 하나같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한 달 반 동안 호텔 밖에 나가지 못했다. 스스로 격리 생활을 자초한 격이었다. 작은 호텔 방에서 아내와 숙식을 해결하며 기사를 쓰려니 문득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한 선교사분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에 한 달 반 만에 극적으로 집을 구했고 갑갑한 호텔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호텔에서 집으로 거처를 옮기자마자 코로나19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나라 전체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만약 집을 조금이라도 늦게 구했다면 호텔 생활을 몇 개월씩 지속해야 했을 터였다. 우리는 집을 구했다는 사실만으로 크게 기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국가 차원의 강력한 봉쇄령이 내려지며 특파원 생활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랜 공석으로 기존에 교류했던 정보원들을 소개받지 못해 스스로 정보를 교류할 취재원이나 아프리카대륙에서 활동하는 외신 기자들을 찾고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런데 밖에 나가지 못하니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취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가 들려와도 현장에 나가 뛸 수 없으니 처음에는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런데도 이제는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팬데믹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슬기로운 특파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 답답하더라도 먼 옛날의 여행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여행자들은 넓은 지역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점이 되는 도시에 여장을 풀고 그 지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변 지역을 이해하고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여행기를 썼다고 한다. 나 역시 아프리카대륙의 관문이라고 불리는 남아공에 중심을 잡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소식들을 모았다. 과거의 여행자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정보를 수집했다면 나는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여 대사관과 교민 사회로부터 최신 소식을 전달받고 화상 통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너무나 당연했던 인터넷이 코로나19로 인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유용한 수단인지 새삼 깨달았다. 한편, 너무 답답할 때면 일상에서 접하는 남아공 사람들의 생활상을 찬찬히 둘러보기도 했다. 남아공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관찰하며 나는 조금씩 남아공에서 특파원 생활에 적응해갔다.

나만 쓸 수 있는 기사를 구상하다

한동안 특파원이 부재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관련된 뉴스는 단편적이거나 우리의 독자적인 시선이 녹아 있지 않았다. 기획기사나 칼럼도 기고되지 않았다. 사하라 이남을 총괄하는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은 그 상징성과 함께 회사에서도 꼭 필요한 자리라고 여겨 다시 파견한 자리인 만큼 나는 혁신을 도모하고 싶었다. 회사에서도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 기사를 요구했다. 나는 전체적으로 기사의 구성을 새로 짜며 기획연재 ‘샵샵 아프리카’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샵샵 아프리카는 때때로 취재일지의 형식을 띠는, 현장성이 가미된 에세이 풍의 기사다. 해외 통신사나 대사관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단신 기사를 올리는 동시에 굵직굵직한 사안을 집중 취재하여 보도하면서 매주 샵샵 아프리카를 구상하고 쓰는 일은 다소 버겁다. 하지만 이를 통해 꾸준히 아프리카대륙을 공부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본다.

또 훗날 귀국했을 때 이를 엮어 책으로도 출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매주 취재하여 작성하고 있다. 사실 꼭 대단한 특종이나 기획기사가 아니더라도 특파원이 생기면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현장에서 쓰는 기사가 늘어나고 축적되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현지 교민들에게 반가운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파원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파원인 내가 교민들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는 ‘덕분에’다. 남아공에 있는 교민들은 내가 쓰는 기사 덕분에 한국에서 전화를 많이 받는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한다. 가끔 심각한 뉴스가 보도되면 근심 어린 연락이 오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기뻐했고 오랜만에 고국에 있는 가족, 친지와 연결된 기분이 들어 행복하다고 했다. 교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프리카대륙과 한국 사이를 좀 더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 같아 나 또한 뿌듯했다.

한번은 요하네스버그 소웨토(Soweto)지역에 취재를 갔다. 남아공의 민주화 운동사에는 1976년 소웨토가 있다. 45년 전 소웨토의 흑인 학생들은 중등과정의 모든 수업의 절반을 백인 중심의 아프리칸스어로 가르치려 하자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당시 경찰은 무장하지 않은 십 대 학생들에게 경고 없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학생 수백 명이 시위 현장에서 스러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아공 정부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남아공은 소웨토 항쟁이 일어난 6월 16일을 ‘청년의 날(Youth Day)’이라고 명명하고 국가 공휴일로 지정해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과 저항 정신을 매년 기린다.

나는 남아공 민주화의 불씨가 된 청년의 날을 앞두고 특파원으로서 꼭 직접 소웨토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취재를 해보고 싶었다. 특히 우리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역사를 지닌 만큼 남아공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국내 독자들도 크게 공감할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요하네스버그 남서부에 있는 소웨토는 각종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로 악명높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19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며 사람들은 방문을 더욱 꺼렸다. 내가 소웨토로 취재를 가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지했다. 만에 하나 가더라도 혼자서는 절대 가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하지만 현지에 있는 취재진은 나 혼자였으며 위험부담이 있는 곳에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혼자 운전해 가기로 했다.

아내는 내게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다며 걱정하며 평소에 내성적이고 겁도 많은 사람이 왜 그러나 의아해했다. 물론 나도 걱정이 많이 되긴 했다. 그런데도 기자로서 마땅히 현장에 가야 한다는 사명감과 내 안에 자리 잡은 기자정신에 이끌려 소웨토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다. 청년의 날 당일이었던 만큼 현지 매체는 물론 외신들도 많이 와 있었다.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의 유일한 특파원으로서 그들과 함께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취재하는 순간이 무척 값지게 느껴졌다. 특히 우리 근대사에 녹아 있는 민주화 운동사와 비교하여 현장을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곳에 온 대부분의 취재진과는 차별화되는 경험이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취재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현장이 안겨주는 긴장감과 그에 따르는 희열감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역시나 용기를 내어 현장에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