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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6 [아프로⑫] 아프리카 대륙과 사람들을 더 넓고 깊게 사랑하다 - 허성용 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월드코리안뉴스]

관리자 / 2021-07-16 오전 10:58:00 / 1612

아프리카인사이트는 아프리카 국제협력 및 옹호활동을 펼치는 시민사회단체다. 국내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국가,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고 아프리카를 향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현지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기여한다.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제법 간단해 보이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 아프리카인사이트는 실로 다양한 활동을 맞물려 전개한다. 작은 규모에 이렇듯 다채로운 사업을 경계 없이 실천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프리카인사이트 허성용 대표는 2008년에 탄자니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아프리카의 현실과 마주했다. 그는 남의 감정에 곧잘 공감하고 자신에게 대입하는 능력을 발견한 사실에 깊이 감사한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받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더 넓고 풍요로운 마음을 갖게 해준 이웃과 친구들이 차별받는 것이 싫어서, 아프리카 국가의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향한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교류와 협력의 길을 모색한다.

탄자니아, 가치와 인식의 전환을 통해 내가 얻은 것

2008년 굿네이버스 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탄자니아에서 컴퓨터 기술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평소에 특별히 아프리카나 자원봉사에 높은 뜻을 품은 건 아니었다. 단순히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배낭여행, 워킹홀리데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차에 해외 봉사단을 알고 호기심이 일었다.

아무래도 견문이 좁았던 20대 초반의 나는 아프리카 대륙과 자원봉사에 어쩌면 왜곡된 환상을 품고 있었던 듯싶다. 너른 초원에 지어진 엉성한 초가집에 머물며 시골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걸 보면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뽐내듯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난다고 말했고, 그들 대부분이 내게 일종의 경외심을 드러냈다. 그 순간을 내심 즐겼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읊은 ‘아프리카’라는 단어에는 도전과 모험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에 간다는 모종의 흥분감과 자긍심이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탄자니아의 첫인상은 내 기대와 무척 달랐다. 어떤 사명감에 휩싸여 밀림을 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언뜻 본 탄자니아는 밀림보다 도시에 가까웠다. 무성한 수풀과 야생 동물이 있어야 할 곳에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 자동차가 즐비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모습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해외봉사단 활동이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줄 거라는 상상을 했던 나는 나의 무지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내가 이 땅에 기여할 활약상을 상상하자 곧 다시 가슴 한켠이 부풀어 올랐다. 다음날 지부장님을 따라 탄자니아 학생들에게 컴퓨터 기술을 전파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굿네이버스가 탄자니아에 지부를 개설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여서 학교부터 지어야 할 판이었다. 지부장님은 반년이면 학교가 완공된다고 나를 위로하며 그동안 건설 현장을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건설 현장을 관리하는 일은 내 계획에 없던 활동이며, 전문 지식이 전무한 분야여서 모든 게 낯설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유난히 덥고 습한데, 현장이 산속 깊이 위치해서 시원한 음료를 구할 길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현지 인부들 눈에도 어리숙해 보였는지 그들은 가끔 내게 짓궂은 장난을 쳤다. 가뜩이나 힘든데 놀리고 괴롭히니 화가 나서 그들을 무시하는 무례하고 못난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전에 몰랐던 내 모습에 흠칫 놀라곤 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은 곧 진로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오히려 시간을 낭비한다는 회의감으로 번졌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숨거나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그저 맞닥뜨려 부딪히는 수밖에. 이왕 왔으니 열심히 하다 보면 무엇이든 얻는 게 있을 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온 단원이 있었고 지부장님이 계셨으며, 도심에 나가면 한국에서 온 또래 친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고민을 나누고 상담 받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반년을 용케 견디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지부장님 말씀대로 학교가 뚝딱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번 일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나는 탄자니아 사람들의 얼굴에서 명암을 동시에 발견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밝은 기색과, 가난과 질병 등의 문제로 고통받는 어두운 기색이었다. 나는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보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태어났다면, 여태껏 당연하게 여긴 물질의 풍요와 권리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런 고민과 성찰을 거듭하며 머릿속에서 마치 두 세계가 충돌하는 듯 혼란스러웠다. 내 얕은 가치관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한 차례 성장통을 겪어낸 내게 봉사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내 이웃이 보다 더 풍요롭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일이 바로 봉사였다.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온 내가 그들을 대상으로 주고 가르치는 일만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내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열악한 환경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서서히 내 마음을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와 그로 인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을 해소할 방법을 그들은 이미 알고 실천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진정으로 이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그런 마음과 삶을 들여다 보고 실천하는 자세를 1년간 흡수하며 나는 굉장히 넓고 풍요로워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게 결코 돈 주고 배울 수 없는 삶의 진리를 심어준 셈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삶을 들춰보면 아픈 구석이 너무 많았다. 나는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좇던 가치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주어진 활동 기간인 1년이 지나면 귀국하여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을 미룬 채 반년을 더 머물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