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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9 [아프로16] 에티오피아에서 봉제 산업의 미래를 발견하다 - 차민호 신티에스 대표 [월드코리안뉴스]

관리자 / 2021-08-20 오전 8:44:00 / 1602

반도체 전문가였던 차민호 대표는 아내인 신금식 신티에스 대표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봉제 산업에 뛰어들었다.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전 세계 고급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아온 신티에스는 베트남 소재의 공장에 이어 추가로 공장을 지을 새로운 지역을 물색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발전을 거듭하며 인건비가 오르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초기에 고생하더라도 인건비가 낮아 고정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제3의 지역을 개척할 필요를 느꼈다. 그 무렵, 차민호, 신금식 대표는 머리를 식힐 겸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에티오피아를 향했다. 

그때만 해도 에티오피아를 새로운 공장 지역의 후보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찾은 에티오피아에서 작은 가능성을 엿봤다. 전반적으로 인건비가 낮았으며, 인구밀도가 높은 수도에 제법 잘 정비된 공단이 자리해 있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는 너무 멀고 낯선 대륙이었다. 당시 차민호 대표는 에티오피아에 공장을 세우는 것에 확신이 없었던 반면, 신금식 대표는 에티오피아에 제2의 공장을 짓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차민호 대표는 고민 끝에 아내의 뜻을 따르되,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을 지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 없이는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왜냐하면 그런 원대한 목표나 명분 없이 도전하기에는 과정이 무척 험난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봉제 공장을 꿈꾸다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에티오피아를 찾았을 때 우리 부부는 무척 가벼운 마음이었다. 우리 부부는 전 세계에 흩어진 바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국가를 여행했다. 그중 유일하게 밟지 못한 대륙이 아프리카였다. 안전하게 에티오피아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일 듯하여 이 김에 아프리카 대륙을 밟아볼 겸 경제사절단에 동참했다. 사실 그때 신규 공장을 지을 새로운 지역을 물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티오피아를 후보로 염두에 두고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너무 멀고 낯선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봉제업은 사실 인력 관리 사업이나 마찬가지다.

인건비를 제품에 체화하여 판매한다. 베트남 공장은 예나 지금이나 잘 운영되고 있으나 베트남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덩달아 인건비도 오르는 추세였다. 언젠가는 베트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 상황에 대비하여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방글라데시가 당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공장부지로 높이 평가됐으나, 그때는 이미 진출하기에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정부가 보여준 공단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입지가 좋고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 조성된 볼레레미(Bole Lemi) 공단이 바로 그것. 무엇보다도 베트남보다 5배가량 낮았던 에티오피아의 인건비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물론 에티오피아는 베트남과 달리 기존 봉제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한계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을 숙련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것으로 판단됐다. 또 공단이 잘 갖춰져 있다지만 그 외 기반 시설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공단 가까이 주거 단지가 조성되어 있지 않으며, 공단과 주거 지역을 잇는 교통이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멀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볼레레미 공단이 무척 인상 깊었으나 에티오피아에 새로운 공장을 지어 기반을 닦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내게는 굳이 그런 상상을 해볼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대뜸 아내인 신금식 대표가 에티오피아에 공장을 짓자고 했다. 기독교인인 아내의 봉사 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나는 원래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주로 화학 회사에서 반도체 관련 일에 종사했다.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봉제 산업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의상학을 전공한 아내가 베트남에 지은 봉제 공장이 전소되면서 가족으로서 상황을 수습하는 데 일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잠시 관여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리 부부는 돈이나 사업에 크게 욕심이 없었다. 문제는 서울 소재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생계를 걱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용기를 한번 내보기로 했다. 아내에게 세계적인 규모의 공장을 지어 신티에스를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 각오로 임한다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협의 끝에 에티오피아 볼레레미 공단에 3만 명 규모의 대단위 공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기숙사도 짓기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에티오피아를 다녀온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계약을 맺기 위해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볼레레미 공단 측에서는 우리가 대규모 공장과 함께 기숙사를 짓는다는 사실을 무척 반기고 환영했다. 우리는 기숙사를 짓고 직원들의 숙식을 해결하는 동시에 베트남에서 숙련된 직원들을 데려와 에티오피아 직원들을 교육하면 빠른 시간 내에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뿐 아니라 회사가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부지 매입비용을 애초에 약속한 금액에서 7배나 높게 부른 것이다. 이미 대단위 공장을 짓는 데 많은 비용을 투자한 이후여서 정부가 부르는 대로 지불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했다. 자국민들이 건강하게 먹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기숙사를 짓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으니 말이다. 이미 공장은 완공하여 가동 중이었던 반면, 기숙사는 부지 가격을 협의하는 데만 꼬박 1년을 허비했고 공사는 지체됐다. 그로 인한 손해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막판에 에티오피아 총리가 이 사실을 알고 부지를 무료로 제공하라고 지시하면서 우리는 손해를 조금 만회할 수 있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라도 기숙사를 지으면 공장을 정상궤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현지의 건설업체를 만나 공사비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사정상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기에 합의는 했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업체로부터 비용을 2배 올려 달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시 에티오피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에티오피아 화폐인 비르(Birr)의 가치가 그 사이 얼마나 폭락할지 모를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정부가 건설업체에 과도하게 세금을 물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공사비를 50퍼센트 올려주는 방향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그 사이 또 건설비를 올려 달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는 힘들 듯하여 에티오피아 정부에 간곡하게 건의했다. 우리 공장을 증축하고 기숙사를 건립하는 일만큼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하게 해달라고.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건설 면허를 받고 포크레인, 펌프트럭 등 모든 기자재를 배에 싣고 가서야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현재는 공장을 2층으로 증축하고 900명 수용 가능한 기숙사 3동이 완공되었었으며, 1동이 지어지고 있다. 전체 10개 동이 완공되면 9,000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에티오피아에서 봉제 분야보다 건설 분야에서 더 확실한 성과를 이뤘다.

우리가 기숙사에 집착한 이유

우리가 기숙사에 집착한 이유는 결근율과 이직률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능률을 올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디스아바바는 물가가 무척 높다. 서울 못지않다. 나는 비 오는 날 직원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매번 안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근하면 하루치 월급과 한 달간 결근을 하지 않은 대가로 만근수당을 받지만, 만약 비오는 날 출근하면서 감기에 걸린다면? 감기약 값이 이 둘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더 비싸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비오는 날엔 결근하는 것이 정답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