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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5 [아프로43] 아프리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아가다 - 이만승 아프리카쇼나갤러리 대표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12-15 오전 9:17:00 / 895
‘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젊은 시절 봉사자로 활동한 이만승 대표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아프리카대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프리카대륙은 초기 인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륙이다. 그런데도 그가 손에 넣은 역사 교과서는 분량이 100페이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리카대륙을 식민지배한 유럽인의 시각으로 쓴 기록이었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Kilimanjaro) 지역에 있는 ‘모시(Moshi)’에 한 중학교 선생으로 봉사를 한 이만승 대표는 아이들에게 이 땅의 진짜 역사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대륙의 진짜 역사를 찾고자 생생한 현장 속에서 직접 발로 뛰기 시작했다. 매주 현지인들도 모르는 오지를 찾아 헤매며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그 험난한 여정을 통해 현지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발굴했는가 하면, 자신도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건강한 눈을 가지게 됐다. 탄자니아의 빈민촌에서 생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을 깨달은 그는 귀국길에 아프리카대륙과 연을 이어줄 매개체를 찾았다. 짐바브웨의 쇼나 민족의 조각가들이 만든 쇼나 조각이었다.

쇼나 조각에는 전쟁이나 가난, 범죄의 흔적 대신에 사랑, 행복, 이타심, 온정이 깃들어 있다. 때문에 전 세계 미술 수집가들도 쇼나 조각을 높이 평가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만승 대표는 쇼나 조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아프리카대륙을 향한 세간의 편견을 깰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몇 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구해낸 쇼나 조각상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순수함을 바라보며 큰 보람을 느낀다. 수년간 아프리카대륙을 탐방한 이만승 대표는 보는 사람마저 순수하게 동화되는 쇼나 조각상 속에 진짜 아프리카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아프리카가 들려주는 역사를 찾아 나선 길

나는 젊은 시절을 배낭 하나만 짊어진 채 낯선 땅에서 보냈다. 2년간 세계 곳곳을 돌다 인더스 문명의 기원에 매료되어 2년간 인도에서 살았고, 30대 후반의 나이에는 봉사단체를 통해 중국의 한 벽촌에 있는 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했다. 대다수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궤적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던 내게 봉사활동가라는 직업은 천직이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그러다 태곳적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아프리카대륙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당시 내가 소속돼 있던 봉사단체는 아프리카에도 지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탐험가이자 여행자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난 나는 아프리카지부를 지원했다. 그렇게 잠비아를 거쳐 2010년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지역에 있는 ‘모시’에서 한 중학교에서 선생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경제 과목을 담당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경제보다 역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50개가 넘는 국가가 있는 아프리카대륙은 초기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의 역사 교과서 분량은 겨우 100페이지에 불과했다. 그것도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대륙을 침략한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시각으로 쓴 것이다. 나는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밤마다 이런저런 원서들과 씨름했다. 하지만 그 원서들 또한 유럽인들이 쓴 기록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 직접 발로 뛰며 엉킨 매듭을 풀어보기로 했다.

어느 도시든 한쪽에는 번화가가, 다른 쪽에는 빈민가가 들어선다. 모시도 마찬가지였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부촌과 빈민촌이 선명히 나누어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물론 탄자니아 사람들도 우려했으나 나는 과감히 기찻길을 건너 빈민가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사는 킴비 씨네 집에서 하숙했다. 시골에서 온 사람들에게 방 한 칸씩 세를 주던 우리네 7~80년대가 떠오르는 정겨운 광경이었다.

킴비 씨 집에는 주인인 킴비 씨 식구 아홉과 장기 세입자 마마 자와디 식구 넷에 두 달 간격으로 들락거리는 세입자가 여럿 있었다.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대문이며 마당을 다 공유했기에 서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어느 집에서 없는 살림에 고기라도 사와 굽는 날에는 몰래 먹는 처지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태도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나는 이 같은 사정을 모르고 마마 자와디가 까치발을 한 채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과 방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아는 체를 했다가 고기를 몇 점 얻어먹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얼마나 눈치 없는 행동이었는지 알았다. 지난해 12월에는 킴비 씨가 조카 딸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보내왔다. 내가 그 집에 함께 살 때 순정만화를 보던 아이였다.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이야기 중 오히려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듣기가 더 어렵다. 아프리카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너무 추상적이다 보니 오히려 거기에서 오해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추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짜 이야기를 자주 접하다 보면 아프리카를 향한 시각도 서서히 바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게 주어진 수업 시간은 일주일에 12시간이었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 혼자 탄자니아 곳곳을 돌아다녔다. 오지를 찾아다니며 현지 학생들도 모르는 탄자니아 이야기를 발굴해 들려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하루는 호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보니 바로 앞에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순간 식겁하여 뒷걸음질 쳐 바로 도망 나왔다. 정말 위험했던 순간은 탄자니아의 한민족인 마콘데(Makonde)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콘데는 마사이(Maasai)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민족이다. 마사이인들은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마콘데인들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모잠비크에 마콘데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장 길을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탄자니아와 모잠비크 국경 사이에 포장된 도로가 없었고 두 곳을 왕래하는 버스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헌 옷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짐 위에 사람을 태워 나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옷을 어찌나 많이 쌓았는지 비닐로 덮어놓은 무더기가 위로 솟아 있었다. 그 위에 나를 포함해 25명이 올라탔다. 그 상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험천만한데,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닐이 물에 젖자 사람들이 앉은 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비닐을 고정하려 묶어 놓은 밧줄을 마치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버텼다. 그 상태로 대여섯 시간을 이동했으니 무사히 살아서 도착한 것이 기적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날의 죽을 고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마콘데 민족이 사는 마을을 찾은 날은 운 좋게도 축제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 진귀한 풍경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두어 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제지를 당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촬영했다. 오후 2시쯤 갑자기 비가 내려 잠시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어깻죽지를 잡더니 나를 트럭에 거칠게 집어 던졌다. 나를 실은 트럭은 시내를 벗어나 밀림을 한참 달리더니 어느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섰다. 군인들은 나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 집어넣었다.

폐건물에 책상 하나 덜렁 놓인 방이었다. 여기서 영영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저녁 6시쯤 천만다행으로 방문이 다시 열렸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 그제야 나를 끌고 와 가둔 이유를 조심스레 물었다. 축제에 참석한 주지사가 인파 속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던 내가 연신 사진을 찍으니 무슨 속셈인지 추궁해보라고 지시해 가두었다고 했다. 조심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컸기에 나는 더는 묻지 않고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