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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31 [아프로30] 국제보건 분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다 - 이훈상 국제보건개발파트너스 대표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3-31 오후 2:09:00 / 1713

더 많은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학부에서 경제학과 공공정책학을 전공한 이훈상 대표는 스무살 때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홀연히 아프리카 가나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또 진로를 고민할 무렵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그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의대에 편입했다. 이훈상 대표는 북한에서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인턴십 제도에 지원했고,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북한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아프리카와 국제보건이라는 새로운 이슈로 시야를 확대했으며, 질병관리본부를 거쳐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의 보건전문관을 역임하며 그 뜻을 이루어 나갔다.

KOICA 가나 사무소에 자진하여 지원한 이훈상 대표는 지금까지 해오던 개발사업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현지 주도적인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었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가나 보건청이 주도한 사업은 성공적으로 안착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사업 방식으로는 기대하기 힘들었을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성과까지 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객원교수이자 국제보건개발파트너스(Global Health and Development Partners: GHDP) 대표로서 국제보건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이 드러났다며, 아프리카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고민의 깊이만큼 성장하다

의사인 아버지는 내게 의대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과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정부 체제 하에 실제로 이뤄지는 정책들이 궁금해 공공정책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학과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좀처럼 또렷한 목표를 세우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공부에 더 열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1학년을 마친 후,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봉사활동을 떠났다. 가나에 파견된 한국인 국제협력의사를 돕는 일이었다. 그 의사분은 학교에서 수업 교재로 쓰던 슬라이드 영사기 프로젝터용 슬라이드 필름을 가져왔다.

그 필름은 한국에서나 내가 공부하던 미국에서나 더 이상 교재로 활용되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온갖 질병의 증상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이 들어 있어 매우 가치가 높았다. 가나 의료진들이 다양한 질병을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귀한 자료였으나, 문제는 사진에 딸린 부연 설명이 한글로 쓰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나에 3개월 동안 머물며 필름에 쓰인 방대한 양의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멀리 가나까지 온 김에 더 보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국제협력의사분의 질문에 직접 현장에서도 활동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때만 해도 공중보건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의료 용어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머물던 지역에는 기생충 질환이 빈번히 발생했다. 1960년대 아코솜보댐(Akosombo Dam) 건설로 전력 생산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경제는 부흥했으나, 하류의 유속이 느려지면서 기생충이 번식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는 환경재난에 해당했다. 나는 지역보건국 보건팀 관계자들이 방역 작업하는 데 따라다녔다. 봉사활동을 다녀오면 생각이 명료해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친구들처럼 일반회사에 들어가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다는 사실만은 명료해졌다. 장래를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지던 무렵 북한에 큰 홍수가 났다. 전 세계 매체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재난이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교포 친구들이 북한을 돕는 자선 행사를 열었다. 나는 그때 행사 홍보를 위한 포스터 속 사진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북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사람이 그 이상 마르고 병약해 보일 수 없었다. 북한 아이들의 참담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당장 그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모금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들을 도울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버지가 권했던 의대에 들어가 소아과 의사가 된다면 북한에서 저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때마침 고등학교 동창 중 한국에 있는 의대에 편입한 친구가 떠올랐다. 나는 그가 밟은 수순을 따라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편입을 준비하여 연세대학교 의대에 들어갔다.


국제보건의 중요성에 눈뜨다

의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설상가상으로 막상 의사가 되도 내가 간절히 원한 대로 북한에 가서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후 편입한 상태였기에 남들보다 4년이 늦었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때부터 뜻을 이룰 방법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러던 중 평양에 WHO 사무소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때마침 외부에서 한 달 반 동안 실습할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주저 없이 WHO 평양 사무소에 인턴십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던 듯싶다. 놀랍게도 답장이 오긴 했다. 평양 사무소에는 인턴십 제도가 없으니 다른 사무소로 연락을 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아쉬웠지만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평양에 사무소가 있으니 WHO에 들어가면 북한에 파견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WHO, 궁극적으로는 북한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나는 WHO 서태평양지구의 지역아동보건사무소에서 인턴십을 했다. 도착한 날 담당자가 내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아동보건과 관련한 정책을 최대한 많이 보고 경험하고 싶다고 답했고, 담당자는 우선 자료부터 읽으라며 논문을 잔뜩 주고 갔다. 논문에는 5세 이하 아동의 사망률이 전 세계 국가별로 기록돼 있었다. 북한이 전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였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당연히 북한의 수치부터 찾았다. 출생아 1천 명당 50명. 한국보다 10배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나의 눈을 의심케 하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르완다 120명, 소말리아 200명이라는 수치를 본 것이다. 모성사망률도 출산 10만 건당 북한이 11건인 한편, 말라위는 400건에 달했다. 북한이 열악하다면, 르완다, 소말리아, 말라위 등의 나라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하나. 상상을 뛰어넘는 숫자 앞에서 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북한 이외의 국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국제보건이라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더 속상한 일은 사망 원인의 상당수가 설사나 감기로 인한 폐렴 등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이었다는 사실이다. 국제보건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소아과 의사가 되어 북한 아이들을 치료하겠다는 마음으로 의대에 편입한 나는 점점 다른 개발도상국 특히, 아프리카국가들과 국제보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제보건 분야에서 임상의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오히려 작았다. 나는 의대를 졸업한 후 과감하게 임상을 포기하고 보건정책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질병관리본부 예방접종관리과 책임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질병관리본부의 체계를 어느 정도 익히자 국제보건을 보다 심도 있게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졸업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KOICA의 보건전문관으로 발탁됐을 때는 먼 길을 돌아왔지만 끝내 막연했던 꿈을 구체화할 기회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KOICA의 내부 전문가로서 보건 사업을 검토하고 구상하며 관련 기술을 지원하는 한편, 직접 수행도 하는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KOICA가 지원하는 국제기구나 NGO의 사업을 검토하고 평가했으며, 해외의 개발원조기관과의 파트너십, 국내 민간기업과의 사회공헌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역할을 겸해야 했지만, 그동안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축적한 지식을 초석 삼아 새로운 경험을 구축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로 여기며 기꺼이 임했다. KOICA가 보건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국가로 출장 가는 일도 잦았다. 그러던 중 2014년 가나 출장이 잡혔다. 거의 18년 만에 가나 땅을 다시 밟는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학부 1학년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학부 시절이나 출장 당시에나 나는 아프리카가 몇 개국으로 이뤄졌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막연하게 아프리카를 하나의 나라로 인식했다.

아프리카대륙에 내재된 역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그곳에서 봉사하고 돕는 모습만 상상하며 가나로 향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출장 당시 그 지역의 공공보건과 방역을 담당하던 현지 책임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둘이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긴긴 밤을 보내곤 했다. 그때 그분이 들려준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아프리카는 국가가 아니다(Africa is not a country)’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깨달음의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 말에 감명을 받은 내게 그는 매일 밤 아프리카대륙에 얼마나 다양한 나라와 문화가 있는지 들려줬다.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는 가나의 의료진과 의료 담당자들이 자국의 보건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번은 지역 보건소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지역의 여성들이 한데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는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 의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여성들은 산전 관리의 날에 출산과 관련하여 산모들이 알아야 할 상식에 음률을 입혀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중이었다. 내가 KOICA에 갓 합류했을 때 KOICA는 가나의 어퍼이스트(Upper East) 지역에 새로운 보건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논의를 한창 추진 중이었다. 가나가 갖춘 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내가 꿈꿔온 형태의 사업을 그곳에서 전개할 수 있으리라 확신이 들었다. 그리하여 자진하여 가나사무소에 근무할 것을 희망했다.